응용학문을 하면서도 본의아니게 여러 이론을 접하는 요즘 인문학 박사 7년차 선배를 만나 나눈 이야기를 통해 정리한 생각이다.
공부를 하다보면 이론의 힘이란 참 대단하다. 그 동안 단편적으로 발견하고 알아왔던 것들이 이론이라는 것 앞에서 하나의 묶음으로 엮이는 것을 보면 그 설명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다. 더불어 그 이론이 지금까지 보지못했던 것까지 보게한다면 속칭 나는 그 이론의 "빠"가 되기에 충분해진다. 혹시 주위에 "난 ~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단계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안타깝게도 이런 이론에 대한 신봉은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풋내기들에게 더 자주 찾아온다.
순수와 응용학문이라는 분리가 가능하다면, 응용학문이 순수학문에서 발견한 이론적 틀을 대하는 태도란 참으로 선별적이다. 응용학문은 자신이 발견하고 만들어낸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여기 저기서 다양한 이론들을 끌어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란 애당초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으로 다른 기반에 서 있던 이론들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데 있다. 종종 어떤 논문을 보면 후기 구조주의 학자부터 비판 이론가들이 한번에 레퍼런스로 등장한다. 이론가에 대한 임의적인 분류가 일어나고 당연히 선별과 레벨링의 과정은 이론적 모순과 긴장을 노정하게 된다. 응용학문을 하는 학자가 여기서 벗어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애당초 자기가 취했던 "선별"이라는 관점을 강조하며 자신의 학문의 바운더리 속으로 회귀하거나, 자신이 발견한 실증적 데이터를 통해 자기가 취한 이론적 틀이 옳다고 주장하는 일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오류들은 무엇보다 후기구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 더 자주 나타날 수 있다. 후기 구조주의가 무엇인지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분명한 것은 보편적이라고 말해지는 것 혹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 그 이론의 칼날을 벼린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론에 이론을 비판하면서 남는 것은 파편화된 이론들의 잔해와 악의적으로 변해버린 비판의 에토스이다. 흔히 후기구조주의와 관련된 토론을 하다가 가장 쉽게 내뺃는 말이란 "푸코는 이런 점에서 문제가 있고, 데리다는 저런 점에서 문제가 있고"라는 식이고 논의를 계속하다보면 결국 동어반복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아마도 후기구조주의가 우리에게 준 인식론적 유산이란 세상을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점과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인식의 산물들도 결국은 기존의 에피스테메 안의 놀이였다는 각성 정도겠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론에 대해 취해야될 입장이란 옳고/그름 혹은 이론에 대한 호불호가 아니라 세상과 현상을 바라보는 인식론적 관점을 선택하고 그 한계를 설정하는 것 아닐까? 즉, 내가 선택한 인식론적 관점과 타인이 선택한 인식론적 관점이 다를 수 있음을 알고, 어차피 나의 인식론적 틀이 완벽하지 않다기 때문에 다른 인식론에 근거한 비판이 타당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도 나의 인식론적 관점이 유효한 것은 무엇보다 이가 다른 인식론적 관점이 발견하지 못한 점을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론과 이론 사이의 경쟁이란 인식론과 인식론 사이의 경쟁이고,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성찰적인 태도와 이에 기반한 새로운 가치와 현상의 발견의 영역이다. 학문을 하는 것은 총체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퍼즐의 한 조각을 맞추는 행위가 아니라 다른 퍼즐판을 짜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양한 이론을 접하면서 취해야할 태도란 우리에게 주어진 이론적 틀을 공고히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론이 주는 다양한 인식론적 틀을 접하면서 나만의 인식론적 틀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흔히 비판이론이 직면하는 대안의 부재란 대안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 대안 또한 내가 비판한 인식론적 틀 안에 있을 수 있다는 자이 인식에 기인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나의 인식론적 틀 안에서 기존에 발견하지 못한 뭔가가 나타나고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가 새로운 조망의 가능성이 된다면 이미 그것으로 대안에 대한 실천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아직 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세계란 바로 이 새로운 것의 언어에 기인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론을 더 읽고 고민하되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나의 인식론적 틀을 짜야 한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내 글에 붙는 유명한 학자들의 레퍼런스가 아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이론의 힘이란 참 대단하다. 그 동안 단편적으로 발견하고 알아왔던 것들이 이론이라는 것 앞에서 하나의 묶음으로 엮이는 것을 보면 그 설명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다. 더불어 그 이론이 지금까지 보지못했던 것까지 보게한다면 속칭 나는 그 이론의 "빠"가 되기에 충분해진다. 혹시 주위에 "난 ~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단계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안타깝게도 이런 이론에 대한 신봉은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풋내기들에게 더 자주 찾아온다.
순수와 응용학문이라는 분리가 가능하다면, 응용학문이 순수학문에서 발견한 이론적 틀을 대하는 태도란 참으로 선별적이다. 응용학문은 자신이 발견하고 만들어낸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여기 저기서 다양한 이론들을 끌어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란 애당초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으로 다른 기반에 서 있던 이론들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데 있다. 종종 어떤 논문을 보면 후기 구조주의 학자부터 비판 이론가들이 한번에 레퍼런스로 등장한다. 이론가에 대한 임의적인 분류가 일어나고 당연히 선별과 레벨링의 과정은 이론적 모순과 긴장을 노정하게 된다. 응용학문을 하는 학자가 여기서 벗어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애당초 자기가 취했던 "선별"이라는 관점을 강조하며 자신의 학문의 바운더리 속으로 회귀하거나, 자신이 발견한 실증적 데이터를 통해 자기가 취한 이론적 틀이 옳다고 주장하는 일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오류들은 무엇보다 후기구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 더 자주 나타날 수 있다. 후기 구조주의가 무엇인지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분명한 것은 보편적이라고 말해지는 것 혹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 그 이론의 칼날을 벼린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론에 이론을 비판하면서 남는 것은 파편화된 이론들의 잔해와 악의적으로 변해버린 비판의 에토스이다. 흔히 후기구조주의와 관련된 토론을 하다가 가장 쉽게 내뺃는 말이란 "푸코는 이런 점에서 문제가 있고, 데리다는 저런 점에서 문제가 있고"라는 식이고 논의를 계속하다보면 결국 동어반복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아마도 후기구조주의가 우리에게 준 인식론적 유산이란 세상을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점과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인식의 산물들도 결국은 기존의 에피스테메 안의 놀이였다는 각성 정도겠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론에 대해 취해야될 입장이란 옳고/그름 혹은 이론에 대한 호불호가 아니라 세상과 현상을 바라보는 인식론적 관점을 선택하고 그 한계를 설정하는 것 아닐까? 즉, 내가 선택한 인식론적 관점과 타인이 선택한 인식론적 관점이 다를 수 있음을 알고, 어차피 나의 인식론적 틀이 완벽하지 않다기 때문에 다른 인식론에 근거한 비판이 타당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도 나의 인식론적 관점이 유효한 것은 무엇보다 이가 다른 인식론적 관점이 발견하지 못한 점을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론과 이론 사이의 경쟁이란 인식론과 인식론 사이의 경쟁이고,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성찰적인 태도와 이에 기반한 새로운 가치와 현상의 발견의 영역이다. 학문을 하는 것은 총체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퍼즐의 한 조각을 맞추는 행위가 아니라 다른 퍼즐판을 짜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양한 이론을 접하면서 취해야할 태도란 우리에게 주어진 이론적 틀을 공고히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론이 주는 다양한 인식론적 틀을 접하면서 나만의 인식론적 틀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흔히 비판이론이 직면하는 대안의 부재란 대안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 대안 또한 내가 비판한 인식론적 틀 안에 있을 수 있다는 자이 인식에 기인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나의 인식론적 틀 안에서 기존에 발견하지 못한 뭔가가 나타나고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가 새로운 조망의 가능성이 된다면 이미 그것으로 대안에 대한 실천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아직 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세계란 바로 이 새로운 것의 언어에 기인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론을 더 읽고 고민하되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나의 인식론적 틀을 짜야 한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내 글에 붙는 유명한 학자들의 레퍼런스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