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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용학문을 하면서도 본의아니게 여러 이론을 접하는 요즘 인문학 박사 7년차 선배를 만나 나눈 이야기를 통해 정리한 생각이다.   
공부를 하다보면 이론의 힘이란 참 대단하다. 그 동안 단편적으로 발견하고 알아왔던 것들이 이론이라는 것 앞에서 하나의 묶음으로 엮이는 것을 보면 그 설명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다. 더불어 그 이론이 지금까지 보지못했던 것까지 보게한다면 속칭 나는 그 이론의 "빠"가 되기에 충분해진다. 혹시 주위에 "난 ~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단계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안타깝게도 이런 이론에 대한 신봉은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풋내기들에게 더 자주 찾아온다. 
순수와 응용학문이라는 분리가 가능하다면, 응용학문이 순수학문에서 발견한 이론적 틀을 대하는 태도란 참으로 선별적이다. 응용학문은 자신이 발견하고 만들어낸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여기 저기서 다양한 이론들을 끌어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란 애당초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으로 다른 기반에 서 있던 이론들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데 있다. 종종 어떤 논문을 보면 후기 구조주의 학자부터 비판 이론가들이 한번에 레퍼런스로 등장한다. 이론가에 대한 임의적인 분류가 일어나고 당연히 선별과 레벨링의 과정은 이론적 모순과 긴장을 노정하게 된다. 응용학문을 하는 학자가 여기서 벗어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애당초 자기가 취했던 "선별"이라는 관점을 강조하며 자신의 학문의 바운더리 속으로 회귀하거나, 자신이 발견한 실증적 데이터를 통해 자기가 취한 이론적 틀이 옳다고 주장하는 일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오류들은 무엇보다 후기구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 더 자주 나타날 수 있다. 후기 구조주의가 무엇인지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분명한 것은 보편적이라고 말해지는 것 혹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 그 이론의 칼날을 벼린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론에 이론을 비판하면서 남는 것은 파편화된 이론들의 잔해와 악의적으로 변해버린 비판의 에토스이다. 흔히 후기구조주의와 관련된 토론을 하다가 가장 쉽게 내뺃는 말이란 "푸코는 이런 점에서 문제가 있고, 데리다는 저런 점에서 문제가 있고"라는 식이고 논의를 계속하다보면 결국 동어반복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아마도 후기구조주의가 우리에게 준 인식론적 유산이란 세상을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점과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인식의 산물들도 결국은 기존의 에피스테메 안의 놀이였다는 각성 정도겠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론에 대해 취해야될 입장이란 옳고/그름 혹은 이론에 대한 호불호가 아니라 세상과 현상을 바라보는 인식론적 관점을 선택하고 그 한계를 설정하는 것 아닐까? 즉, 내가 선택한 인식론적 관점과 타인이 선택한 인식론적 관점이 다를 수 있음을 알고, 어차피 나의 인식론적 틀이 완벽하지 않다기 때문에 다른 인식론에 근거한 비판이 타당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도 나의 인식론적 관점이 유효한 것은 무엇보다 이가 다른 인식론적 관점이 발견하지 못한 점을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론과 이론 사이의 경쟁이란 인식론과 인식론 사이의 경쟁이고,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성찰적인 태도와 이에 기반한 새로운 가치와 현상의 발견의 영역이다. 학문을 하는 것은 총체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퍼즐의 한 조각을 맞추는 행위가 아니라 다른 퍼즐판을 짜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양한 이론을 접하면서 취해야할 태도란 우리에게 주어진 이론적 틀을 공고히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론이 주는 다양한 인식론적 틀을 접하면서 나만의 인식론적 틀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흔히 비판이론이 직면하는 대안의 부재란 대안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 대안 또한 내가 비판한 인식론적 틀 안에 있을 수 있다는 자이 인식에 기인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나의 인식론적 틀 안에서 기존에 발견하지 못한 뭔가가 나타나고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가 새로운 조망의 가능성이 된다면 이미 그것으로 대안에 대한 실천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아직 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세계란 바로 이 새로운 것의 언어에 기인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론을 더 읽고 고민하되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나의 인식론적 틀을 짜야 한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내 글에 붙는 유명한 학자들의 레퍼런스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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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논쟁을 했다. 거추장스럽게도 부르디외와 푸코에 대한 것이었는데, 사실 제대로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혹은 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함께 이야기한 사람들이 나를 포함하여부르디외를 전공하는 사회학도도 아니고, 푸코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철학도도 아니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터졌다. 전문가(?)가 아니라 그냥 대사상가들의 책 몇 권 읽고, 그들에 관한 개론서나 2차 문헌 몇 개 읽고, 귀동냥으로 몇 가지 들은적 밖에 없는 우리 같은 풋내기들이 자신들의 어줍잖은 해석을 내어 놓으면서이다. 
철학이나 사회학의 대중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이런 철학자나 사회사상가들의 이야기를 자기식으로 읽기를 권한다. 책을 읽고 해석하는 자유야 누구에게나 있으니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또 다른 지식을 만들어내고 생산하는 장으로 옮겨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론 지식 생산의 장이 기존 학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제도적 문화자본이 없어 비전문가로 일컫어지는 '일반인'에서도 숨은 고수가 많은 요즘이니깐). 이 지식이 유통되는 장에서  전제해야 하는 것은 자의적이고 때로는 창의적인 해석보다 공동으로 합의되는 부분을 찾는 일이다. 가령 부르디외나 푸코의 경우 글 자체도 난해할 뿐만아니라 개념들이 새로우면서도 열려져있고 간혹 기존의 정의와 다르게 개념들을 정립하는 경우가 있어서 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합의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작업들의 많은 부분들이 속칭 전문가(학계든 학계가 아니든)들이 짊어질 몫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쩌면 수동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러한 지식의 분업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나는 철학자나 사회학자가, 아니 적어도 푸코를 전공하는 철학자나 부르디외를 전공하는 사회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푸코나 부르디외를 전공하는 사람들만이 이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지금 내가 공부하고 올인하려는 다른 분야가 있다. 그 분야의 공부를 따라가는 것도 적지 않은 수고를 요구한다. 하지만 공부라는 것이 고립된 공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서 종종 인접학문의 동향이나 자신이 하는 학문의 철학적 사상적 기반을 찾고 싶어진다. 나처럼 응용학문을 하다가도 철학책이나 사회학책을 보는 이유이다. 그리고 종종 이런 사상들을 자신의 이론적 틀로 가져오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응용학문이 범하기 쉬운 가장 큰 오류는 이런 큰 사상들을 논의되는 맥락에서 분리시켜 자기의 입맛에 맞게 자신의 연구에 배치시키는 일이다. 종종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뜬금없는 혹은 자신이 속한 분야의 다른 학자들이 보기에도 굳이 이런 큰 개념이나 틀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아무런 논리 전개에 지장이 없어보이는 곳에 그 개념을 사용해버리는 것이다. 푸코나 부르디외의 예를 들자면, '담론', '지식-권력', '아비투스', '장' 같은 것이 그 예이다. 더 나아가 푸코에게서 '담론이 생산적이다'라고 할때, 그 '생산적'이라는 말은 또 무엇인가? 아비투스는 '취향이 육화된 것이다'라고 할때 취향과 육화는 또 무엇인가? 이 이해하기 힘든 개념과 그 개념을 설명하는 또 다른 개념 속에서 벗어나는 가장 쉬운 길은 그냥 일상의 언어로 귀환하는 일이다. 즉,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로 그 개념을 이해해버리고 그 개념을 자신의 연구에 적용해버리는 것. 하지만 기억해야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사상가들의 개념이 그렇게 진지하게 논의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개념이 가지는 포괄성 이면에 일상적인 이해와 이질적이고 그래서 난해한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들 사상가들의 고갱이는 여기에 있다.
내가 푸코와 부르디외를 읽는 이유는 그들 이론에서 그래도 어느 정도 합의되는 부분만이라도 찾아보기 위해서다. 창조적인 재해석 따위는 꿈도 꾸지 않는다. 나에게는 그들의 텍스트를 읽는 일만으로도 버겁다. 종종 이차 문헌이 저자들의 해석이 담겨져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것들 신경쓸 겨를도 없다. 오히려 깔끔하게 정리해주면 고맙다. 같이 읽자고 권하고 싶다. 이렇게해도 정리가 안 되는 것들이 이분들의 사상이다. 일단은 그래도 개론적이고 자의적이지 않은 범위 내의 해석, 이것이 내가 목표로 하는 바다.
왜 이렇게 수동적이냐고 하지 마라! 나에게 요구되는 재창조란, 개념을 재정의하는 일이 아니라 이 공동의 해석을 나의 분야에 적용하는 행위 그 자체이다. 이미 그 개념을 본래 철학적이고 사상적인 맥락에서 떼어내서 나의 영역에 놓는 것 자체가 커다란 실험이고 고역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나에게 필요한 태도는 이론과 사상을 대하는 겸손함이다. 부끄러운 일은 푸코나 부르디외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푸코나 부르디외가 아닌 것을 보고 푸코나 부르디외라고 부르는 일이다. 가끔 내가 이분들의 '고귀한' 책을 집어 던지고 싶어도 꾹 참는 이유도 바로 쪽팔리기 싫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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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전에 몇 가지 하고 싶은 것 나열.

등산, 힘들게 올라서 시원한 마음으로 아래를 내려볼 수 있는 곳.
아구찜, 회냉면, 대구탕, 시래기국 먹기. 아, 시원하고 얼큰하고 콤콤한 것 땡긴다.
패거리들과 거나한 막걸리 한 잔.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사람과의 대화
한국 소설. 이렇게 논문만 읽다가는 완전 감따될꺼 같다. 인터넷으로는 시대정신은 읽어도 그 내면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러고보니,
진주도 그립고, 일산도 그립고, 부산도 그립고, 서울도 그립다. 진주는 무엇보다 사람들과 갔던 부대 앞 식당들이 생각나고, 일산은 호수공원과 혼인신고를 했던 동구청이 떠올라지고 스리빠 신고 쏘다니던 이상한 불언지 스페인언지 헤깔리는 이름의 거리도 생각난다. 서울은 뭐, 번잡한 곳은 모르겠고 서울대 연건 캠퍼스 기숙사 앞이 생각나고 패거리와 같이 살던 꼭대기 자취방도 생각난다. 부산은 당연히 해운대와 반고흐의 테라스, 오페라 레스토랑이 떠오른다.

이 풍경의 느낌을 뭉게뭉게 뭉쳐보면 추운 겨울날 따뜻한 정종의 느낌이다.  이제 썰 풀었으니,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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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ntityandLanguageLearning
카테고리 인문/사회>언어학
지은이 Norton (Longman,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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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미 제2언어/외국어 교육에서 하나의 정전이 되었다. Norton은 자신의 박사논문(아마 1993년 OISE 박사논문인 것으로 기억한다)을 바탕으로 몇 편의 논문을 TESOL Quarterly에 발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2000년에 이 책을 집필하였다 (TQ에서 논쟁도 한 번 붙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유의미한 지적임에도 불구하고 Norton은 다소 악의적으로 대응을 했다. 그 논쟁에서 이야기 되었던 바는 신기하게 이 책에서 명시적으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그녀의 연구가 적어도 응용언어학 분야에서 상당히 중요한 이유는 정체성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연구 이후 제2언어/외국어 학습자 정체성 연구는 모두 그녀에게 빚지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캐나다나 미국같이 이민자가 많은 환경에서는 이 정체성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당연히 이에 대한 연구도 상당히 많이 진행되었고 특히 Norton의 연구 이후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일종의 유행을 타서 누군가의 말처럼 이제는 그 새로움에 대한 열망마저 잃고 SLE 분야에서 너무도 당연한 한 경향이 되어버린 정도이다. 특히 사회학이나 인류학에서 정체성에 대한 이론이 계속 새롭게 유입되고 있고 사회언어학이나 언어인류학, 담론분석에서 이야기하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이제 이 정체성이라는 말의 계보를 따져야할 것 같다. 
외국의 연구는 이러한데 사실 한국 외국어 교육에서는 이 정체성의 문제가 서구 학계만큼 논의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민을 받는 국가가 아니라는 사회적 배경과 더불어 인지-언어학 중심으로 형성된 학계 흐름도 정체성 연구를 더디게 만드는 것 같다. 원래 이 정체성 연구 자체가 상당히 사회적 의제, 권력의 문제와 맞닿아 있고, 교육학적으로는 비판적 흐름에 가까워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Norton의 주요 논문이야 여기서는 거의 필수 텍스트라 이미 읽은 경험이 있지만 언어 교육에서의 정체성 문제를 사회경제적 질서와 연결시켜야하는 나에게 다시 Norton의 견해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역시 단행본이 논문보다 풍부하고 어쩌면 더 솔직하게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 것 같았는데 무엇보다 이 책 이후 Norton의 개념 발달의 맹아를 보는 재미도 솔솔했다. 주요 주장과 내가 생각하는 한계는 다음과 같다.

1. Norton은 제2언어 학습이 개인의 동기와 의미화 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학습자가 속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학습이 일어나고 이를 그녀는 investment라는 말로 개념화 하였다. 아무리 동기가 높은 학습자라고 하더라도 그 사회에서 이방인인 그/녀를 받아주지 않으면 학습은 일어날 수 없다.

2. 그래서 그녀에게 영어란 하나의 사회문화적 자본이다. 영어학습이란 이러한 사회문화적 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실천인 것이다.

3. 하지만 늘 그렇듯 언어라는 사회문화적 자본은 사회에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지 않다. 특히 이민자에게 영어라는 상징자본은 원어민이 가진 것으로 특권화된다. 바로 여기서 권력의 문제가 개입된다.

4. Norton은 이 책을 통해 지속적으로 언어학습에는 권력이 개입한다고 역설한다. 이민자들은 주류 사회에 편입하기 위해 영어라는 중요한 상징자본이 필요하지만, 맑스 식으로 이야기하면 시초축적이 일어나지 않아, 즉 원어민과 같이 영어를 할 수 없어 원어민과 이야기할 수 있는 그래서 영어를 배우고 사용할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한다.

5. 바로 이런 영어 학습에 대한 investment와 영어라는 상징자본을 매개하는 것이 정체성이다. 즉, 학습자가 어떠한 정체성을 가졌느냐에 따라 다양한 investment의 양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Norton에게 학습자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일은 교사나 학습자에게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6. 여기까지는 부르디외의 언어에 대한 경제학적 모델을 그녀는 적용한다. 하지만 종종 부르디외 모델의 단점으로 지적되는 것이 (나는 동의할 수 없지만) 결정론적인 경향이다. 부르디외 이론의 이해는 장과 아비투스의 상호작용이 핵심인데, 장을 구조로 아비투스를 개인의 주체성으로 환원하여 장이 아비투스를 결정한다는 식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있다. 

7. 아무튼 Norton은 이러한 결정론적인 해석을 피하기 위해 정체성의 개념을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에서 끌어오지 않고 Weedon이라는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스트 학자의 관점을 가져온다. 그래서 정체성은 복수적이고 변화하며 투쟁의 장이라고 해석한다. 아무튼 주체성에 대한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인데 나는 여기서 Norton 연구에서 이론적 긴장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8. Norton이 생각하는 정체성에 대한 개념은 사실 현재 사회언어학을 비롯한 다른 분야의 정체성 연구에서 모두 전제하고 들어가는 바이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그녀의 정체성에 대한 개념이 후기구조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후에 나온 그녀의 논문을 읽어보면 그녀가 설정한 후기구조의의 범주는 소쉬르/촘스키적 언어관에 비판적이기만 하면된다. 그래서 부르디외, 바흐찐, 푸코 등이 다소 무차별적으로 후기구조주의자로 명명된다. (이 점과 관련하여 TQ에서 그녀의 논문을 비판했는데 그녀가 한 말은 실망스럽게도 이론적 틀에 대한 절충주의적 관점-즉, 현상을 설명할 수 있으면 여러 이론을 가져오면 되지, 이론에 맞게 현상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이었고, 이론적 해석이 맞지 않다라는 주장을 하려면 저기 이론적인 부분을 이야기하는 분야에 가서 하라는 식으로 말했다.)

9. 그녀의 연구는 상당히 반성적이고 철저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학습자의 이해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그녀가 그렇게 권력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 권력을 둘러싼 사회구조적 혹은 담론적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모호한 관점을 취하고 있다. 즉, 학습자가 이야기하는 다양한 생애경험들이 모두 원어민-비원어민이라는 권력의 장으로만 수렴되어 버린다. 그래서 결론이 이러한 권력의 틀을 해소하면 (그 방법은 정체성의 변화를 통한 저항, 즉 나도 말할 수 있다는 권리의 표명이다) 영어학습이 일어날 수 있다는 논지이다.

10. 하지만 푸코가 말한 것과 같이 권력은 늘 생산적이다. 즉, 원어민-비원어민의 구조는 억압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식의 담론과 그에 따르는 권력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가령, 한 학습자는 자신의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자신을 정규직으로 다른 사람을 비정규직으로 대립시킨다. 자신은 정규직이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습에서 나는 또 다른 계급 권력 관계가 재생산 되는 모습을 목격한다.

11.  더군다나 (나는 이러한 나의 주장이 참으로 감당이 안되는 질문인 것을 안다. 하지만 이제는 한번쯤 던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연구에서 당연시 되는 것은 이민자들은 영어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학습자들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든 노력들이 정체성의 틀 안에서 논의된다. 하지만 그녀들은 왜 영어를 배워야만하는 것일까? 물론 사회에서 중요하니깐. 이 대답은 너무 당연해서 궁색하다. 결국 이러한 영어에 대한 욕망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영어를 배워야한다는 생각은 어떠한 과정으로 내면화되는 것일까? 영어를 잘 하면 그녀들은 정말 행복해질까? 그리고 교육과 관련하여 학습자의 영어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그것이 인지적이든 사회적이든 부정할 수 없는 명제인 것일까? 

그래서 나는 다시 물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들에게 영어란 무엇인가?  최근 내가 언어 이데올로기에 관심을 갖는 이유이다. 어쩌면 시작은 학습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영어의 사회적 담론적 의미가 아닐까 싶다. 학습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학습자의 다양한 모습과 대면한다는 것인데 (예를 들면, 주류 권력의 담론을 재생산하는 말이라든지 행동들), 자칫 그들의 허물을 그들에게로 돌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권력과 담론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할 듯 싶다. 이제 정체성도 권력도 하나의 변수가 아니라 분석이 대상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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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마감일이야 없었지만 계획대로라면 2주전에 내야하는 페이퍼 하나를 여전히 붙잡고 있다. 페이퍼의 질문은 언어능숙도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를 BICS/CALP와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질문은 다소 난해하고 모호했지만, 머리 속 어떤 내용을 써야겠다는 대충의 길잡이는 있었다. 일년동안 GA하면 배웠던 CEFR에서 말하는 언어능숙도를 언급하면서 BICS/CALP와 잘 연결하면 되겠다 싶었다. 왠지 죽여주는 페이퍼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선뜻 컴퓨터 앞에 앉기가 두려워졌다. 계속 관련 논문들만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박사과정의 8할은 읽고 쓰는 것이다. 꾸역꾸역 읽고 그것을 개발세발 게워내는 게 일이다. 하지만 글쓰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다. 아이디어는 많지만 일단 서 놓고 보면 이상한 나부랭이가 되고 마는 경우가 많다. 그 나부랭을 보고 곧잘 하는 생각이 조금 더 읽고 생각을 정리하면 되겠지이다. 그렇게 점점 글쓰기는 암흑의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몇자 쓰고 "새로운 문서" 버튼을 클릭한다. 
박사과정 고수들은 (4년차 이상의 선배들) 종종 글쓰기와 관련하여 연륜이 묻어나는 말을 내뺃는다. 박사과정 5년차 S는 매일 조금씩이라도 써야한다고 말한다. 박사과정 7년차 K는 글쓰기에 힘을 빼야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들 모두는 논문을 쓰는 중이다. 
이 힘을 빼야된다는 이야기는 조금 더 곱씹어볼 만하다. 그 선배의 말은 이렇다. 논문을 쓰기 시작때 어깨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고 한다. 지금까지 읽었던 모든 다른 논문들이 한계로 점철된 허접 덩이리로 보인단다. 나의 논문은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뭔가가 될 수 있을 것 같단다. 하지만, 컴퓨터 앞에 앉으면 한 문장을 쓰기가 버거워 진다. 그리고는, 글쓰는 것이 무서워지고, 마침내는 컴퓨터 앞에 앉는 것 조차 무서워 진다. 세월은 그렇게 간단다.
그가 내어놓은 힘빼는 방법은 논문을 하나의 스토리 만들기로 생각하는 것이다. 드라마가 계속 임팩트만 있을 수 없듯이 논문도 계속 새로운 임팩트를 가질 수 없다. 분명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서 정말 내가 죽여주는 내가 정말 재미있게 쓸 수 있는 부분, 거기서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힘빼고. 그리고 그 부분을 어설픈 다른 부분들과 효과적으로 배치하면 높낮이가 있는 논문이 된단다. 
촌발날리지 않는, 기성적이지 않는, 한문장 한문장에 누구 말마따나 적어도 5개의 레퍼런스에 해당되는 생각들이 담기는, 그런 글을 써야한다는 생각에 나에게 너무 힘이 들어갔나 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 힘을 빼는 일이다. 점점 글을 써야하는 상황이 도래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나의 글쓰기에 대해 생각이 많아 지는 요즘이다. 욕심도 생기고 그것을 버려야되는 일도 생긴다. 도닦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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